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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내려놓고 잠시 걸을까? 안국동 별궁길’

퇴근길 버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뻐근해진 목을 쭉 늘였다.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분주했었던 손목이 이제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느라 분주했다. 피곤해진 두 눈을 껌벅이며 주변을 돌아보니 나와 같은 모양새를 한 사람들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길을 걷는 사람들,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커피 한 잔을 들고 바쁜 길을 걷는 o|들의 손에도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나도 저런 모습인가’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 귀퉁이가 허전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집 앞 계단을 오르는 순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스마트폰 액정만큼 좁아져 가는 나의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일은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어딘가 걸어야겠다고. 내는 망설임 없이 다음 날 안국동 ‘별궁길’을 선택했다.

전통과 현대 근대와 향수가 숨 쉬는 곳

안국동 별궁길은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커피숍 스타벅스와 아몬디에 사이의 골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종로경찰서에서 율곡로 건너 맞은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북촌한옥마을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길은 전통과 현대 근대와 향수가 숨 쉬는 곳이다.

별궁길은 근처 서울민속박물관에서 근무했던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다. 점심을 서둘러 먹으면 꼭 걷게 되는 길이 있다며 함께 걷자 한 길이었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 나는 곳곳에서 배어나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매번 걸어도 그 느낌은 변치 않아 산책로로 자주 드나들고 있다.

별궁길온 안동별궁 터가 있는 풍문여고를 끼고 있다. 안동별궁은 조선 시대 왕실의 거처였던 곳으로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 공간으로 사용된 궁터이기도 하다 이 길을 걸으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옛 궁의 정취에 덩달아 궁인처럼 사락사락 발끝을 세우고 걷게 되곤 한다.

바쁘단 핑계로 주말을 빌려 오랜만에 찾은 별궁길에는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포기할까’ 싶을 정도로 무서운 기세였다. 고민하는 사이 비는 여전히 우산을 후두둑 씻고 지나가, 바닥에서 몸을 굴렸다. 젖어가는 신발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발아래 찰박이는 빗물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걷기로 했다.

비 내리는 그길, 역사의 현장에 서다

별궁길 초입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들이 서로 몸을 기대 있는 것이 보였다. 구불구불 좁은 길에 선 차들은 코를 맞대고 있고, 이제는 부쩍 보기 어려워진 낡은 간판들이 먼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산책에 방해되리라 생각했던 장맛비는 오히려 별궁길의 정취를 더했다. 비에 젖은 오랜 건물들은 짙은 나무 냄새를 뿜고, 여름 녹음은 더욱 진하게 풀냄새를 흔들었다.

별궁길을 걸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아기자기한 카페들이다. 카페들은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하며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역시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기(茶器)와 관련된 공방이다. 부드럽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 가지런히 놓인 다기들을 보고 있자면 그 단아함에 지갑으로 손을 뻗게 되곤 한다. 이날 역시 마음은 충분히 동했지만, 산책이 목적이니 그만두기로 했다. 두 손은 가볍게, 마음도 가볍게 하는 것이 산책 아니던가.

이윽고 가장 반가운 장소 중 하나가 나를 반겼다.

그 주인공은 마카오의 명물이라는 ‘앤드류스 에그타르트’다. 앤드류스 에그타르트는 영국인인 ‘앤드류 W. 스토우’에 의해 개발되어 마카오와 대만, 싱가폴, 일본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생과자다.

한국에서 드라마 ‘궁’에 나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아기자기한 디스플레이는 한 눈에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사랑스럽다. 이곳의 애그타르트는 느끼하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앤드류 에그타르트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별궁길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현재와 공존하는 근대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별궁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이 아마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대통령의 가옥일 것이다.

처음 윤보선 가옥이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78년이다. 윤보선 가옥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됐고, ‘안국동 공덕귀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후 2000년 4월에 ‘안국동 윤보선가’로 문화재 지정 명을 개칭했다. 2002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438호로 격상된 상태다.

이곳은 고즈넉하면서도 잘 꾸며진 실내 정원이 아름답기로 잘 알려졌다. 서양 양식을 받아들인 넓은 정원과 채양, 한말의 양식들이 공존한다. 가옥은 고종 시절인 1870년대 지어졌다.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산정채), 대문채, 별당, 광채, 부속채 등으로 구성된 총 ‘99칸의 저택’이다. 고정이 이 집을 매입해 영혜옹주와 혼인을 올렸던 박영효에게 내려준 일화가 있다. 이후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 선생이 매입해 현재까지 윤씨 일가가 살고 있다.

윤보선 가옥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이 가옥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 민주정당의 창립을 함께한 장소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젊은 시절 자주 왕래하던 곳으로 ‘한국 야당의 회의실’이라 불리기도 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두 전 대통령을 불러 후보 단일화를 당부했던 장소도 윤보선 가옥의 산정채였다고 한다. 현재는 윤씨 일가가 생활하고 있어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고 나면 담 넘어 아스라이 보이는 전원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흔적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윤보선 가옥의 맞은편에는 소허당과 안동교회가 있다. 1909년 김창제의 집에서 시작된 안동교회는 100년이라는 세월을 이 주변 지역과 함께하고 있다. 세월만큼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이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윤보선 대통령이 자주 찾은 것은 물론, 조선어학회 소속으로 한글을 지키려다 옥사한 이윤재 선생이 안동교회의 장로를 지내기도 했다.(별궁길에서는 옛 조선어학회 터도 볼 수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벽과 교회 담을 넘어 오르는 풀숲이 그간의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소허당은 안동교회가 세운 한옥 별채로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공간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뜻은 ‘성령의 은총으로 허심의 마음에서 즐거운 웃음을 웃는 멋스러운 기와집’이라는 뜻이다. 대형 가택은 아니지만 소담한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현재는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강좌를 열고 있으며, 토요일에는 찻집으로도 운영되고 있다. 아쉽게도 이날은 거친 비 때문인지 문이 열려 있지 않았다.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갈림길

소허당과 안동교회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하나는 북촌한옥마을로 나가는 길이고, 하나는 경복궁 방향으로 빠지는 길이다. 북촌으로 가는 길을 걸으면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등장한다. 이 길을 걸으면 낡고 허름한 공예방과 세련된 갤러리가 몸을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보면 볼수록 생경하고 재미있는 광경이다. 시대의 경계에 서 있는 건물들은 시간 감각을 어그러뜨려 묘한 쾌감을 주기도 한다.

북촌 방향의 길을 걸어가면 세련된 카페들이 줄이어 있다. 주변에 삼청동 카페 골목이 있긴 하지만, 이 방면의 카페를 더욱 애용하는 편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비교적 적고 여유로워 유럽의 카페나 상점에 들른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특히, ‘우드 앤 브릭’은 눈과 입이 즐거운 맛있는 빵들로 가득한 곳이다. 일반 프랜차이즈와 달리 특색 있는 제품들이 많이 선보인다. 바깥으로 보이는 풍광도 아름다워 간단한 브런치를 즐기기에 좋다.

예쁜 카페들을 연이어 구경한 다음, 경북궁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이 아름다워 평소에 많은 이들이 걷는 길목이건만 이날은 비가 쏟아져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가는 길에 국가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드는 은장도 가게가 눈에 띄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은장도를 들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냥 지나칠 순 없어 걸음을 멈췄다. 가게 앞에 진열된 화려한 은 장신구들이 시선을 끌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자인들이 아니라 더욱 매력적이었다.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길을 걷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게의 좁은 쇼윈도 앞은 금세 전시장이라도 된 듯 북적였다.

은장신구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빠져나와 몇 걸음 더 걸으니 정독도서관이 보였다. 비가 오지 않을 때면 별궁길에 들러 꼭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정독도서관 탐방이다. 벤치가 마련돼 있고 정원이 아름다워 신선한 여름 공기를 마시기에는 그만이다. 정독도서관 옆으로는 별궁길을 벗어나 삼청동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산책에 지쳤을 때는 잠시 별궁길을 벗어나 삼청동 카페 골목 구경을 가보는 것도 좋은 코스다.

다시 인사동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감고당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동을 향하는 길목은 많은 음식점들로 가득하다. 분식부터 만두, 돈가스점 등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 산책 후 가볍게 요기하기에도 좋다. 이곳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라 특히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근래에 생긴 빈티지 블라워숍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아름다운 꽃들이 온 가게를 덮고 있다. 완전히 공개된 내부는 하나의 온실을 보는 듯했다. 이날 가게 앞에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카메라를 들어 가게를 촬영하느라 분주했다.

별궁길을 동고 돌아 감고당길로 들어서자 슬슬 다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마트픈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쯤 걸었던 걸까. 다시 고개를 들자 좁은 세상 속에 갇혀 있던 눈에 신선한 안약을 떨어드린 것처럼 시원했다. 짙은 녹음은 눈을 쉬게 했고, 비에 씻겨진 공기는 습기를 머금긴 했지만 상쾌했다. 나는 이 여정의 마지막 코스를 결정했다. 감고당길에서 다시 별궁길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이 골목은 많은 이들이 지나는 길은 아니다.
덕성여고 옆을 지나는 좁은 골목인데, 들어서면 어쩐지 편안하고 고즈넉한 인상을 주는 골목이다. 가끔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주말이면 난 이 골목에 숨어들어 그늘 밑에 땀을 식히곤 한다. 골목을 들어서자 여전히 편안한 풍경이 이어졌다. 쭉 이어지는 돌담 옆으로는 덕성 여고의 옆태가 한눈에 들어오고 맞은편에는 살림집들이 비좁게 서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자 어느 한 여고생이 총총거리며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문뜩 떠오르는 학창시절에 입가에 슬쩍 웃음이 스쳤다. 우중충한 흐린 날씨도 이겨낼 듯한 산뜻한 발걸음이었다. 나는 그 학생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음에 찾을 땐 더 맑은 하늘에서 별궁길과 학생의 모습을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